
우리 학교에는 ‘학교 수다실’이라는 이름의 공간이 있다. 이름만 들으면 가벼운 대화의 장소 같지만, 사실은 학교의 온기가 가장 진하게 머무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교사들의 전문적 학습공동체 모임, 학부모 독서모임, 학생과 교사가 함께하는 대화의 시간 등이 열린다. 학교의 미래를 이야기하면서도 눈물과 웃음이 오가는, 사람 냄새 나는 교실이다.
지난 10월 31일, ‘학교 수다’의 열여덟 번째 모임이 열렸다. 이번 주제는 김효선 작가의 『오춘실의 사계절』. 8명의 학부모와 6명의 교사가 책 속 ‘엄마’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아인 저는 엄마 얼굴이 기억나지 않아요.
그래도 아들에게 좋은 엄마가 되고 싶어요.”
“어른이 되어 생각해보니 잔소리하던 엄마가 참 그리워요. 그땐 왜 몰랐을까요.”
이런 이야기들이 이어지자 누군가 농담처럼 말했다.
“교감선생님, 오늘도 휴지가 많이 필요하겠네요.”
모임이 끝나면 울고 웃던 학부모와 선생님들이 따로 모여 담소를 나눈다. 책 한 권을 두고 진심을 나누다 보면, 마음의 벽이 허물어진다. 필자도 지난 6월 올해 첫 모임에서 함께 울었다. 교감선생님은 나를 ‘T형 인간’이라 했지만, 나는 그날 스스로 ‘F형’임을 인정했다(웃음).
이 ‘학교 수다’는 2021년, 전임 교장선생님이 설계한 프로그램이다. 책을 매개로 학부모와 교사가 공감하며 소통하는 자리를 만들자고 시작한 일이다. 지금은 우리 학교의 대표 브랜드가 되었다. 교감선생님이 책을 선정하면, 희망 학부모과 교사에게 책과 함께 세 가지 질문을 보낸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엄마와 함께했던 추억은?”
“잊히지 않는 엄마의 모습은?”
단순한 질문 같지만, 이 세 가지 대화는 학교 공동체를 단단히 잇는 끈이 된다.
올해 첫 번째 수다 모임(6월 13일)에서는 학생들의 영상 인터뷰가 함께 상영됐다. 학부모는 자녀의 진솔한 이야기에서 울컥했고, “이런 자리를 자주 만들어 달라”는 요청이 쏟아졌다. 책을 함께 읽고, 생각을 나누고, 자녀의 마음을 엿보는 그 시간은 교사에게는 교육의 의미를, 학부모에게는 학교에 대한 신뢰를 새롭게 만들어준다.
그간 우리 학교에서 학교 수다를 거쳐간 책과 저자는 다음과 같다.
2021년
△사람에 대한 예의(권석천) △어린이라는 세계(김소영) △긴긴밤(루리) △다정소감(김혼비) △우리는 우리를 잊지 못하고(김민철)
2022년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이길보라) △H마트에서 울다(미셸 자우너)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조던 스콧) △말센스(셀레스트 헤들리) △아이의 방문을 열기 전에(이임숙)
2023년
△우리는 왜 대학에 가는가(EBS 왜 우리는 대학에 가는가 제작팀)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경향신문 젠더기획팀) △무기력의 비밀(김현수)
2024년
△번역 : 황석희(황석희) △2000년생이 온다(임홍택)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조승리)
2025년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하재영) △오춘실의 사계절(김효선)
위 내용은 우리 학교 역사의 일부이다. 내년도 2026년! 책과 함께하는 학교 수다 모임이 기대 된다. 학교의 역사는 이런 작고 진심 어린 만남의 연속에서 쌓인다. 지방의 한 고등학교가 살아남는 길은 거창한 혁신에 있지 않다. 학교를 신뢰하는 학부모, 학부모와 공감하는 교사,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자라는 학생. 이 삼각형이 단단할 때 학교는 흔들리지 않는다.
백산고는 비평준화 지역의 인문‧수학‧과학 중점 농어촌 기숙형 전북미래학교이다. 올해도 신입생 60명을 ‘모집’이 아니라 ‘선발’한다. 미리 학생과 학부모와의 1:1 상담을 통해 11월 안에 대부분의 신입생이 확정된다. 단순히 입학을 권유하는 과정이 아니라, 학교의 철학을 나누고 가정과 함께 아이의 성장을 설계하는 시간이다.
지방고의 경쟁력은 ‘커리큘럼’도 있지만 ‘공감’에서도 나온다. 수다에서 시작된 관계의 회복, 그것이 학교를 살리고 지역을 살린다. 아이는 혼자 자라지 않는다. 교사와 학부모, 지역이 함께 울고 웃을 때 비로소 교육이 완성된다.
학교의 긍정은 그렇게 피어난다. 한 권의 책, 한 번의 수다, 한 줄의 진심에서 말이다.
▶유석용 백산고등학교 교장
전) 서울진학지도협의회 회장
전) 전국진학진도협의회 수석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