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동 PICK 시사 TALK] 정조의 인간적인 면모

TV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이 벌써부터 화제.
‘옷소매 붉은 끝동’은 같은 이름의 인기 웹소설을 드라마로 옮겼지. 조선시대 ‘세기의 연인’으로 꼽히는 이산과 성덕임의 사랑 이야기야.
이산과 성덕임이 누구냐고? 그걸 알면 더 흥미로워질걸? 이산은 조선 제22대 왕 정조(1752~1800)의 이름이고, 성덕임은 훗날 정조의 후궁이 되는 의빈 성씨(1753~1786)의 원래 이름이거든.
드라마에선 깐깐한 완벽주의자인 왕세손(다음 왕위를 이어받을 왕세자의 맏아들) 이산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개척하려 하는 당찬 궁녀인 성덕임을 만나면서 사랑꾼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려. 작가의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이야기 아니냐고? 놉. 역사 자료에도 의빈 성씨를 향한 정조의 애틋한 마음이 기록돼있다고. 못 믿겠다면 따라와!
○ 덕임 향한 이산의 사랑
이산(정조)과 덕임(의빈 성씨)이 왜 ‘세기의 연인’일까? 그건 바로 이산이 15년 넘는 시간 동안 덕임을 마음에 담아두었기 때문이야. 반면 덕임은 궁녀의 신분임에도 왕의 고백(?)을 두 번이나 거절했지.
놀라운 이들의 사랑 이야기는 정조가 직접 쓴 ‘어제의빈묘지명’에 기록돼있어. 어제의빈묘지명은 의빈 성씨가 세상을 떠난 뒤 정조가 그를 애도하며 직접 쓴 묘지명(묘지에 기록한 글)이야.
어제의빈묘지명에 따르면, 덕임은 수학을 금세 이해할 만큼 똑똑하고 미모도 뛰어난데다 붓글씨도 잘 써서 소설을 필사(베껴씀)하는 일을 했어. 1766년 당시 왕세손이었던 이산은 덕임을 마음에 두고 품으려 했지. 하지만 덕임은 “세손빈(왕세손의 아내·효의왕후)이 아직 아기를 낳지 못하였는데 어찌 감히 제가 승은(여자가 임금의 사랑을 받아 밤에 임금을 모심)을 받겠습니까”라며 이산을 거절했어. 그로부터 15년뒤 이산이 왕이 된 뒤에도 덕임은 또 정조를 거절했어. 이에 정조가 덕임의 하인에게 화를 내며 꾸짖자, 그제야 정조의 명을 따라 후궁이 됐지.
의빈 성씨는 1782년 아들인 문효세자를 낳아 궁중의 사랑을 받았어. 하지만 1786년 어린 문효세자가 세상을 떠났고, 크게 상심한 의빈 성씨도 그 6개월 뒤 눈을 감았어. 의빈 성씨를 잃고 크게 슬퍼한 정조는 여러 편의 어제(御製·임금이 지은 글)를 남겼어.
‘사랑하는 빈’ ‘세상에 빈과 같은 사람이 어찌 많겠는가’ ‘너 또한 내가 슬픔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을 슬퍼할 것이다’ 같은 표현을 통해 정조의 애틋한 마음을 확인할 수 있지.
○ 왕권을 높이려 한 정조
정조는 왕의 역할도 결코 게을리하지 않았어. 정조는 제21대 왕 영조(1694~1776)의 손자이자 사도세자(1735~1762)의 아들. 알다시피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는 할아버지로부터 뒤주에 갇히는 벌을 받다가 세상을 떠났기에 정조는 ‘죄인의 아들’이라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지. 그래서 정조는 왕이 되자마자 왕권(임금의 권력)을 높여야겠다고 생각했어.
왕의 직속 군대인 ‘장용영’을 만들어 군사적인 기반을 다졌어. 학문을 연구하는 기관인 ‘규장각’을 세워 정조를 도와줄 똑똑하고 바른 신하들도 양성했지. 규장각의 인재였던 정약용에게는 계획도시인 ‘수원화성’의 설계를 맡겼어. 백성들이 편하고 안전하게 생활할 ‘읍성’과 전쟁에 대비한 ‘산성’을 모두 갖춘 성곽 도시로 만들어 상업과 군사의 중심지로 삼았지.
▶에듀동아 최송이 기자 songi12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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