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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인 최초의 천주교 신부, 김대건
  • 최송이 기자

  • 입력:2021.08.20 09:00
[에동 PICK 시사 TALK] 김대건 신부





 

조선시대 후기 '신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평등사상을 내세운 천주교가 들어오자, 양반에게 억눌려 살았던 사람들이 천주교를 믿었어.
그러나 나라에선 평등사상이 신분 질서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천주교 신자를 박해(못살게 굴어서 해롭게 함)하기 시작했지.
천주교 박해가 심했던 1821년 8월 21일, 충청남도 당진시 솔뫼마을에서 한 아기가 태어났어. 이 아이는 가족들이 천주교 박해로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끝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지. 그가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부인 김대건 신부(1821~1846)야. 
2021년은 김대건 신부가 탄생한 지 200주년이 되는 해. 유네스코는 김대건 신부를 '2021년 세계기념인물'로 지정했어. 당진시는 올해를 '김대건의 해'로 선포하고 김대건 신부 캐릭터와 솔뫼 김대건 서체 등을 만들었어. 그가 태어난 8월 21일 즈음에는 기념 행사가 열리지. 김대건 신부가 어떤 업적을 이뤘는지 좀 더 자세히 알아볼까?


○ "내 신앙은 빼앗을 수 없을 것" 



당진시가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및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 선정을 기념해 만든 어린이 김대건 신부 캐릭터. 당진시청 제공



김대건은 16세에 조선에서 천주교를 알리던 프랑스인 모방(P. Maubant) 신부를 만나 ‘안드레아’로 세례를 받고 신학생으로 선발됐어. 마카오로 건너가 라틴어와 철학, 신학 교육을 받았지. 프랑스어와 중국어 등 외국어 실력도 뛰어났다고 해. 
1842년 유학을 마친 그는 천주교 탄압이 계속되던 조선으로 밀입국(몰래 입국함)을 시도했다가 실패하기를 반복하다 1845년에야 서울로 들어왔어. 비밀리에 선교(종교를 전하여 널리 펼침) 활동을 시작하고 예비 신학생들을 뽑아 신앙 공부를 시켰지. 하지만 탄압이 너무 심해 다시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조선교구 3대 주교였던 페레올 신부의 주관 아래 서품식(사제를 임명하는 의식)을 치르고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가 됐어. 
페레올 신부와 함께 조선으로 돌아온 뒤에는 조선 곳곳을 다니며 천주교 신앙을 널리 알렸어. 1846년 5월 외국 선교사들의 입국을 위한 비밀 항로를 개척하다가 체포됐지. “종교를 버리라”라는 말을 들으며 심한 고문을 받았지만, 끝까지 “내 목숨을 빼앗을 수는 있어도 내 신앙은 빼앗을 수 없을 것이다”라며 믿음을 지키다 결국 25세의 나이로 순교(자기가 믿는 종교를 위해 목숨을 바침)했어.
김대건 신부는 짧은 시간 동안 성직자로 활동했지만, 박해를 무릅쓴 투철한 신앙으로 아직까지도 존경받아. 1984년 당시 교황이었던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우리나라 성인(聖人·신앙과 덕이 특히 뛰어난 사람에게 교회에서 내리는 칭호)으로 추대(윗사람으로 떠받듦)됐어.


○ '솔뫼성지' 
 

당진 솔뫼마을 김대건 신부 유적. 문화재청 제공


 

종교에서 신성시하는 장소를 ‘성지(聖地)’라고 해. 주로 종교의 발상지나 순교가 있었던 지역을 의미하지.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곳은 ‘소나무가 산을 이루고 있다’는 뜻을 가진 ‘솔뫼’ 마을이었어. 김대건 신부의 증조할아버지 김진후(비오·1814년 순교), 작은할아버지 김종한(안드레아·1816년 순교),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 김제준(이냐시오·1839년 순교), 그리고 1846년 순교자가 된 김대건 안드레아까지 4대의 순교자가 살았던 곳이지. 이곳을 ‘솔뫼성지’라고 불러. 현재는 ‘당진 솔뫼마을 김대건 신부 유적’이란 이름으로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 제529호로 지정돼있어.

 



 



▶에듀동아 최송이 기자 songi12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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