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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UN군 최고 사령관, 맥아더 장군
  • 최송이 기자

  • 입력:2021.07.23 11:00
[에동 PICK 시사 TALK] 7월 27일 유엔군 참전의 날

 





6·25 전쟁​ 당시 모습. 동아일보 자료사진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이 군사경계선이던 북위 38도선을 넘어 남한을 기습 침략하면서 6·25 전쟁이 일어났어. 그동안 소련의 지원을 받아 전쟁을 준비해왔던 북한군은 거세게 공격하며 남쪽으로 내려왔지. 무방비 상태였던 우리 국군은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겼고, 두 달 안에 경상도 일부를 제외한 남한의 모든 지역을 빼앗겼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16개 나라가 참여한 국제연합군(유엔군)을 남한으로 파견했어. 국군과 유엔군은 힘을 합쳐 북한군에 맞섰고, 다시 북쪽으로 밀고 올라가며 서울을 되찾았지. 이후 38선을 중심으로 밀고 밀리는 전투가 3년 넘게 이어지다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전투 중단을 합의하며 맺은 협정)을 맺으며 전쟁은 지금까지 멈춰있어.
7월 27일은 6·25 전쟁 당시 우리나라를 도와준 유엔군 참전용사의 희생에 감사하고 그 정신을 기리는 ‘유엔군 참전의 날’이야.



○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인천상륙작전 당시 맥아더 장군(오른쪽에서 두 번째)의 모습. 위키미디어 커먼즈 제공


6·25 전쟁 당시 유엔군을 이끈 총사령관은 미국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그는 한반도를 직접 정찰하며 북한군을 진압하는 작전을 세웠어. 그가 계획한 ‘인천상륙작전’으로 국군과 유엔군에 불리하게 흘러가던 전세(전쟁의 형세)가 완전히 역전됐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맥아더 장군은 탁월한 지략가이자 훌륭한 리더로 평가받아. 하지만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하지. 인천상륙작전의 승리로 자신감에 찬 맥아더 장군은 “계속 북쪽으로 올라가 전쟁을 끝내자”고 밀어붙였어. 북쪽으로 더 진격할 경우 중공(현재의 중국)군이 개입할 가능성이 높다는 주변의 걱정도 무시한 채 독선(혼자만이 옳다고 생각함)적으로 결정했지. 압록강까지 북진(북으로 진격함)해 통일을 눈앞에 뒀지만, 결국 한반도에 들어온 중공군의 인해전술(인력의 수적인 우세로 압도하는 전술)에 패하면서 다시 밀려 내려와야만 했지. 그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과 군인이 희생됐어.

 


○ 인천상륙작전
 

인천상륙작전 당시의 모습. 동아일보 자료사진

 

맥아더 장군은 북한군의 공격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경상도의 낙동강 지역까지 밀려 내려왔을 당시, 불리한 국면을 전환하려면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 낙동강에서 북한군과 전면전을 펼치지 말고, 배를 이용해 인천에 기습적으로 상륙해서 북한군의 뒤를 공격하고 적진의 허리를 끊어내는 전략을 생각해냈지. 이것이 바로 인천상륙작전이야. 
밀물과 썰물이 심한 인천의 지형 탓에 작전 성공이 어려울 것이라고 모두가 주장했지만, 맥아더 장군은 “성공 확률이 적은 만큼 적군도 쉽게 예상하지 못할 테니 오히려 기습 효과를 노릴 수 있다”고 주장했어.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했고, 이후 서울도 금방 되찾은 뒤 평양과 북한 지역 대부분도 장악했지. 11월 중공군이 북한군을 돕기 시작하면서 다시 밀려나게 됐지만 말이야.




 

 



▶에듀동아 최송이 기자 songi12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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